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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 DPRK (North Korea) & Niigata

"과거와 타인은 바꿀 수 없지만, 자신과 미래는 바꿀 수 있다"
2017년 9월 11일 (월) ~ 15일 (금)
핵실험을 멈추지 않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을 시찰.
가장 위험했다던 X 데이.

60만엔을 대가로 손에 넣은 것은 4박 5일 티켓.

보게 되는 것은... 꿈인가 현실인가. 아니면

2017년 9월 15일 (금) 조선 06:02 | 일본 06:32
미사일발사 25분전 ---.

X의 시각인가?

2017년 9월 20일 (수) ~ 21일 (목)
1977년 11월 15일 (화) 어느 한 소녀가 홀연히 사라진 니가타현을 시찰.

미디어가 보도할 수 없는 진실, 최신 사진과 동영상을 일부 공개
시작하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이하 '조선')의 역사배경에는 3가지 핵심 과제가 존재한다. 그것은 이산가족상봉, 핵실험문제 그리고 남북통일문제이다. 문제해결방법을 모색하기 위해서는 우선 이 세가지 주요과제에 주목해야 한다.

2018년 한국의 삼대과제

(1) 이산가족상봉

일부 조선 공작원에 의해 일본인이 납치된 지 40년 넘게 지났다. 지금은 피해자들이 ‘어떻게 납치되었는지 보다 어떻게 자랐는지’가 더 걱정된다. 내가 스스로 현지에 머물 수 있다면 일정기간에 걸쳐 관광사업 등을 통해 외교관계를 구축해나가는 것도 하나의 방법일지도 모른다.

(2) 핵실험문제

현지 분들은 핵 실험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고립 속을 버텨온 조선인에게 있어서 미사일은 유일하게 자랑할 수 있는 첨단기술이며, 결코 전쟁을 위한 것이 아니다."
개인적인 견해로는 핵실험 동향은 세계가 어떻게 평가를 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고 생각한다.

(3) 한국통일 문제

1980년 10월 10일 (금) 제 6차 노동당 대회에서 제창된 내용은 김일성주석의 책에서도 이렇게 언급하고 있다. "온 민족대단결의 원칙으로 나라의 평화통일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두 체제와 두 정부를 그대로 두고, 온 민족의 이익을 대변하는 통일적인 민족국가를 창설하는 것 외에 길이 없다는 것이 현실이다. 그런 의미에서 고려민주연방공화국의 창립이야 말로 가장 바르고 합리적인 통일방안일 것이다." 전쟁 이후 유일하게 벽이 남은 국가라는 면에서도 정말 조선과 화해할 수 있는 나라는 같은 한반도에 위치한 한국밖에 없을 것이다.

목차 [비표시]
현지법 과학기술전당 조선미인
(1) 국가의 호칭 주체사상탑 조선요리
(2) 최고 지도자의 호칭 대동강 조선의 과자
시찰경위 메이데이 스타디움 2017년 9월 15일 (금)
티켓의 구매 당창건 기념당 미사일 발사 25분전 ---.
일본 ~ 중국 2017년 9월 11일 (월) ~ 12일 (화) 만경대의 생가 미사일 발사 2분전 ---.
(1) 하네다공항 출발 평양 지하철 평양국제공항 도착
(2) 북경공항 도착 만경대 학생 소년 궁전 (동영상 포함) 신세진 가이드 두 분
중국 ~ 조선 2017년 9월 12일 (화) ~ 15일 (금) 노래방 지하 1F (평양 고려 호텔) 북경공항 도착
(1) 북경공항 출발 조국 통일 3대헌장 기념탑 엽서 한 통
(2) 평양국제공항 도착 평양 개성 고속도로 (동영상 포함) 돌이켜보며.
평양시 중심부 안내도 휴전 협정 조인장
개선문 판문점 일본과 조선의 역사
류경호텔 38선 니가타현 시찰
평양고려호텔(동영상 포함) 고려 성균관 (세계 문화 유산) 지금부터 41년 전 ---.
모닝 옐 선죽교(세계 문화 유산) 니가타역 도착
만수대 대기념비 표충비(세계 문화 유산) 현재의 조선과 니가타를 비교
김일성 광장 우표 판매점 (고려 성균관 앞) 니가타에 세워진 간판
미래 과학자 거리 평양 서커스 극장 (동영상 포함) 마지막으로.

현지법

(1) 국가호칭

우선 많은 분들이 잘못 부르고 있는 '북한'. 정식명칭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며, 생략하는 경우에는 '조선', 내지는 '공화국'이라고 부르는 것이 현지법이다. 현재는 남북으로 분열중이기 때문에 양국 모두 '북'과 '남'을 붙여 부르는 발언은 대립국을 연상시키기 때문에 충분히 조심하는 것이 좋다.
영어로는 'Democratic People 's Republic of Korea'혹은 DPRK 라 한다.

(2) 최고지도자의호칭

현지에서의 대화에서 최고지도자의 이름을 포함하는 경우에는, 원칙적으로 아래의 경칭에 기초하여 부를 필요가 있다.

시찰경위

2017년 8월 9일 (수) 조선중앙통신(KCNA)은 중거리탄도미사일 4발을 미국령괌을 향해 발사할 계획을 8월 중순까지 책정할 예정이라 밝혔다.

나는 처음으로 주식시장에 데뷔한 달에 100만엔을 투자했으나, 조선보도의 영향으로 최종적으로는 자산가치가 약 30만엔이나 하락했다. 그 반동으로 현지시찰을 결의했다.

이때 군사관련주식만이 분투하고 있었던 것을 기억한다. 일본상공을 미사일이 통과할 때 일본인이 느끼는 많은 위기감과 불안감을 현지분들에게 전달하니 "깜짝 놀라게 해서 미안하다고 생각하지만, 우리나라는 정확한 거리로 발사할 수 있는 기술력을 자랑하고 있을 뿐"이라고 답했다. 상식적인 대답은 아니지만 이렇게 현지에 들어가야 알 수 있는 국민성도 깨달았다.

티켓의 구매

항공권은 중외여행사를 통해 구입했다. 이곳을 선택한 이유는 조선 여행대행업무를 오래 전부터 진행하고 있으며, 전화응대도 좋았기 때문이다. 총 금액은 4박 5일 31만 9000엔. 이 요금내역은 나의 호텔 숙박료와 식비뿐만 아니라 중국인가이드가 베이징에서 하룻밤 숙박하는 호텔요금과 일본어를 할 줄 아는 조선인가이드 2명, 그리고 드라이버 1명의3일치 여행 경비 모두를 포함하고 있다. 이 투어는 그들이 동행하는 것이 조건이다.

현지에서 사용한 돈은 +2 만엔 정도. 사용 가능한 통화는 엔화를 비롯하여 중국 위안화, 유로화, 달러 등 다양한 지폐로 지불이 가능하다. 단, 신용 카드는 사용이 불가능하다.

일본 ~ 중국 2017년 9월 11일 (월) ~ 12일 (화)

(1) 하네다공항 출발. 일본 16:30

상대에게 마음이 좌우된다는 것은 "아프다"기보다 "쓰리다". 가정을 꾸리면 돌아갈 곳이 있고, 기다릴 곳도 있다. 그러나 일본인중 대부분은 신을 믿지 않지만, 상대의 눈에 어떻게 비치는지를 항상 두려워한다.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면 상대방의 속내는 더 모를 것이다.

(2) 북경공항 도착. 중국 19:30 | 일본 20:30

1일차는 중국 베이징에서 체류했다. 친절하고 상냥한 중국인 가이드와 함께 저녁 식사를 했다. 붉은 순무와 고수 샐러드를 비롯해 양꼬치는 일품이었다.

중국 ~ 조선 2017년 9월 12일 (화) ~ 15일 (금)

(1) 북경공항출발. 중국 13:05 | 일본 14:05

이곳의 조선행 체크인 카운터를 촬영했을 때는 조선배지를 붙인 직원이 무서운 표정으로 이쪽으로 다가오며 어째서 촬영했는지를 추궁했다. 그런데 조선에 간다고 말하자 갑자기 기분 좋은 미소로 수긍하며 그 자리를 떠났다.

기내에서는 음악 프로그램을 보거나,

신문을 읽으면서 시간을 보냈고, 다른항공사와 큰차이는 없었다.

(2) 평양국제공항도착 (순안국제공항) 조선 15:35 | 일본 16:05

출입국심사카운터에 발을 디디니, 이야기 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 공간에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다. 하나 말할 수 있는 것은 이 자리에 있던 모두가 내 목에건 카메라에 주목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평양공항에서 엄격한 심사가 이루어졌다. 전자기기보다는, 사람의 눈을 속일 수도 있는 만화책에 무엇인가 끼워져 있을까봐 각 페이지를 펼쳐보며 세세하게 확인했다. WiFi 장비는 귀국날짜까지 공항에 맡기는 것이 원칙이었다.

공항 주변은 국민들의 손에 의해 깨끗하고 예쁘게 정비되어 있었다. 처음으로 향한 곳은 평양의 랜드마크라고도 불리는 장소이다. 공항에서 차로 15분 정도 주행한 위치에 있다.

평양시중심부안내도

개선문 -1985년 4월 15일 (월) -

모란봉의 산기슭에 건립되어 있다. 김일성주석은 항일전투를 전개하여, 일제식민지통치로부터 조선을 해방시키고 조국에 개선하였다. 4개 기둥에, 군상부각과 주석이 혁명의 길에 올랐을 때부터 해방을 달성하기까지의 연대를 나타낸 '1925'및 '1945'라는 숫자, 그리고 '김일성 장군의 노래'가 부조되어있다.

높이 60m, 정면폭 52.5m, 측면폭 36.2m, 아치문 높이 27m, 아치문 폭 18.6m로 세계에서 가장 큰 개선문으로 1만 500여개의 화강암으로 만들어져 있다.

전망대에 오르기 전에 먼저 5분 정도 동영상을 보고 개선문의 역사를 배운다.

여기서는 기념품도 구입할 수 있으며, ‘주체철학에 대하여 (2002)’, ‘한국전쟁의 메아리 (1996)’, ‘조선관광 (2014)’세 권을 구입했다. 문장은 매우 세련된 일본어로 번역되어있다.

류경호텔

1987년 착공되었으나, 1992년에 중단되었다. 중단된 지 16년이 경과했을 무렵 이집트 통신 대기업 오라스콤 텔레콤의 투자를 통해 2008년 재개되었다. 30년을 거친 끝에 2017년 개업했다(?). 높이 330m / 105층으로 세계 2위인초고층호텔이다. 투자금액은 위키백과정보에 의하면 약 144억엔이라고 기재되어있다.

평양 고려 호텔 -설립일 불명-

주소는 평양시 중구역 동흥동 (창광대로). 평양역에서 왼쪽으로 약 200m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높이 143m / 45층의 트윈 타워 호텔로 1000여명을 수용 가능하며, 최상층에는 평양시 전경을 전망할 수 있는 회전 전망 레스토랑과 세련된 바, 노래방 등 오락 시설도 완비되어있다. 또한 조선의 전원 전압은 220V, 주파수는 60Hz이지만 일본 '100V50 ~ 60Hz' 대응 콘센트도 상비되어 있다. 호텔을 이용한 적이 있는 일본의 저명인사 중에는 전 프로레슬링 선수 안토니오 이노키 씨와 전 총리 고이즈미 준이치로 전 총리 등이 있다.

동영상

국제호텔에서는 매일 NHK 월드를 시청할 수 있다.
민간주택에서는 주말에만 볼 수 있는 듯하다.

동영상

조선의 음악방송

외국인관광객에게는 자신의 통신기기를 사용한 연락이 일체금지 되어있지만, 유일하게 호텔 1층에 이메일만 허용되는 PC가 한 대 설치되어있다.

모닝옐. 조선 08:14 | 일본 08:44

아침식사를 마치고 호텔을 출발하니, 여군들이 출근하는 비즈니스맨들에게 아침 성원을 보내고 있었다. 이것은 아침이 약한 나에게는 매우 부러운 서비스이다.

만수대 대기념비

만수대의 정상 부근에는 김일성 동상 (1972년 4월 건립)과 김정일 동상 (2012년 4월 건립)이 늘어서있다. 뒤에는 조선 혁명 박물관 • 양측은 큰 기념탑이 있다. 이곳은 신성한 장소로 취급받기 때문에 존경을 표하는 것은 임의로 간주된다. 주위에 묵묵히 꽃다발을 바치는 사람이 나타나 긴장감이 감돈다.

나도 세계평화를 기원하며 경의를 바치고왔다.

현지에서는 신형차량도 유통되고 있지만 구형차량도 많이 보인다. 사진 속 차량은 아마 1970년대에 유통된 메르세데스 벤츠 230E으로 보인다.

현지사람들의 헤어스타일은 검은 머리카락에, 복장은 차분한 카키나 그레이 색깔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마치 어린시절 부모님 앨범에서 본 사진 속으로 들어간 것 같은 신기한 기분이 들었다.

김일성 광장 -1954년 8월 준공-

세계에서 16번째로 큰 중앙 광장이다. 면적은 75,000 제곱 미터로 바닥에는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타일이 깔려있다.

인류가 살고 있는 지구에는 반드시 '음'과 '양'이 있으며, 사람들 눈이 닿지 않는 곳에서, 대체할 수 없는 많은 힘들이 작용하여 세계가 이루어지고 있다.

미래과학자거리

대동강을 따라 건설된 독창성과 예술성을 갖춘 고층주택군. 3 ~ 4천 세대 정도의 거주지 및 국가의 과학연구기관을 비롯한 교육기관, 공원 등 150여개의 주상복합시설이 늘어서 있다. 거주자는 주로 대학교수나 공훈이 있는 사람이 많다. 또한 조선에서는 거주지 및 학교수업은 무료로 제공되며, 음식도배급제이다. 급여체계는 보합제도로, 매월 1 ~ 10만엔 정도라고 한다.

과학 기술 전당 -2015년 10월 건설-

과학과 관련된 다양한 생각이 담겨 있으며, 체험형 전시물이 많이설치되어있다. 3D 안경을 쓰고 롤러 코스터 체험 등도 할 수 있었다.

과학기술전당에서는 김정은 위원장이 앉았던 의자들이나 엘리베이터에도 꼬리표를 붙여 귀중품으로 지정했었다. 그가 보는 미래에는 앞으로 얼마나 많은 과거가 그려질까?

이렇게 아이들이 자유롭게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을 보면 안심된다.

물론 조선에서도 스마트폰은 보급되고있어, 앱과 게임도 많이 있지만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은 한정되어 있다고 한다. 사진 속 스마트폰 제조사는 ‘평양’이다.

주체사상탑 -1982년 4월건립-

김일성 주석 탄생 70주년을 기념하여 건립되었다. 높이 170m / 전통적인 조선식 석탑건축양식을 살려 흰색화강석을 쌓아올려 세웠다. 사용된 돌수는 365 × 70주년치인 25500개이다. 전망대까지 엘리베이터로 올라가, 평양시내를 전망할 수 있다.

대동강

한반도 북서부를 흐르는 하천이며, 주변을 잇는 6개 다리가 특징이다. 전체길이는 439㎞ / 면적 20,000㎢의 유역면적을 갖는 제5위의 대하이다.
사진에는 찍혀있지 않지만, 왼쪽부터 소개하면 충성의 다리, 살짝 보이는 양각교, 대동교, 김일성 광장(1965년), 옥류교(1960년)가 보인다. 안쪽에는 능라교(1988년), 살짝 보이는 청류교, 메이데이스타디움(1989년)이 보인다.

메이데이스타디움 -1989년 5월 1일 (월) 준공-

낙하산 형의 건축미가 특징으로, 대동강의 중천 능라도에 위치한 평양의 명승지로 유명하다. 좌석은 15만석을 넘어 세계에서 12번째 규모의 최대 경기장이다. 1995년 4월 28일 (금) ~ 29일 (토)에는 조선정부 • 신일본 프로레슬링 • WCW 협력하에 '스포츠와 평화의 제전'이 개최되었다. 이틀동안 총 38만명으로 추정되는 많은 관중을 동원했다. 당시 안토니오 이노키의 스승인 역도산씨가 한반도출신이었기 때문에 신일본 프로레슬링이 강력하게 추진했다고 한다.

당창건기념당 -1995년 10월건립-

조선로동당창건 50주년을 맞아 건립되었다. - 높이 50m (50주년에서 유래). 원형 띠에는 '조선인민의 모든 승리의 조직자이며 향도자인 조선로동당만세!' 라는 슬로건이 새겨져 있다. 띠는 수령, 당, 대중의 일심단결을 나타낸다.

만경대의생가

만경대는 '김일성주석'이 탄생하여 유년기를 보낸 유서깊은 땅이다. 당시 조선의 농촌에서는 어디서나 볼 수 있었던 소박한 초가집에서 탄생하여 어린 시절을 보냈다. 주석의 증조부 김응우 선생님대부터 4대를 이어 살아왔다. 생가에는 주석과 일가 사람들이 애용했던 가재도구 등이 보관되어있다.

평양지하철 -1960년 건설 • 1973년 9월 6일 (목) 개통 (2018년현재 • 역 17개역 / 3개노선)-

현재 세계에서 가장 깊다고 알려진 만큼, 피난처도 겸하여 만들어진 지하철이다. 에스컬레이터로 편도 3분이 소요된다. 파란셔츠를 입은 남성은 우리의 가이드이며, 혼잡 시에는 노인에게 자리를 양보할 정도의 신사이다.

길을 걷다보니 순진한 미소를 띤 귀여운 소년을 만났다.
이 아이의 미소 앞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평화로워질 수 있을지 모른다.

만경대 학생 소년 궁전 -1989년 5월-

하루에 수천 명의 청소년 학생들이 자신의 희망과 소질에 맞는 다양한 과외 활동에 참여하여 기술을 배우고 있다. 건물외관은 양팔을 벌려 아동들을 감싸 안는 따뜻한 품을 표현하여 건축되었다. 건물은 백수십개나 되는 동아리방, 수영장, 체육관등이 있다. 때로는 스카우트 활동을 수행하여 반년 간 교육 기간을 통해 아이들의 재능을 꽃 피우고 있다고 한다.

"아이들은 우리나라의 보물입니다. 미래의 조선은 우리 아이들의 것입니다. 김일성"이라고 적혀있다.

머리에 항아리를 놓고 회전하는 아이는 처음으로 봤다.

인간의 가능성은 무한한 것 같다.

동영상
동영상

한 시간 동안 선보인 아이들의 단결력과 연주력은 아주 훌륭했다. 지금은 어린이들로부터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경의를 표할 상대가 위에도 아래에도 있다는 것을 안 덕분에 항상 성장의 과정을 걸을 수 있다.

자신이 보지 못했던 것들을 받아들임으로써 보다 많은 정보가 머리에 스며들 수 있게 되었다.

저녁 식사시간을 맞아 레스토랑으로 이동.

평양의 명물 돌솥비빔밥.
평소 먹을 기회가 없기 때문에 본고장요리를 현지에서 먹을 수 있는 것은 행운이다.
맛은 상상에 맡겨드립니다.

노래방지하 1F (평양고려호텔)

식사를 마치고 고려호텔 지하에 있는 노래방으로 이동했다. 나의 무리한 부탁도 많이 들어주신 가이드 분에게 감사의 마음을 담아 한잔했다.

노래방 주인 아주머니와 모두가 사카모토 큐씨의 곡 '위를 보며 걷자'를 불러주었다. 이 곡은 언제나 일본과 조선과의 대화를 포기하지 않는 한 남자가 여기서 부른 노래이다. 이 곡 가사에 담긴 의미를 이해하고, 일본 음악을 깊이 사랑하며 노래를 부르는 가이드와 아주머니들의 모습. 마음이 담긴 노래 속에는 사람들의 마음을 울리고 평화를 지키는 힘이 있다.

그런 밤이 지나고 아침 7시 40분.

오늘 향하는 곳은 판문점이다.

조국통일 3대헌장기념탑 -2001년 8월-

평양 개성 고속도로 입구 근처에 세워져 북쪽과 남쪽을 대표하는 두 명의 여성이 조국통일 3대 헌장마크를 들고 있는 모습을 나타내고 있다.

평양개성고속도로 -1992년 4월 12일 (일) 준공-

실제로 동영상으로 체험해보세요.

동영상

가는 길에 휴게소에 들러 맛있는 커피를 마셨다.

휴전 협정 조인장

1950년 6월 25일에 한국 전쟁이 발발했다.
1953년 7월 27일 오전 10시 한국 휴전 협정이 체결되었다 (서명).
내용은 "궁극적인 평화 해결이 성립할 때까지 조선에서 전쟁 행위와 모든 무력 행사를 모두 정지할 것을 보장한다"고 규정. 그러나 궁극적인 평화 해결(평화 조약)은 아직 성립되지 않았다. 또한 당시 이승만 대통령과 김일성 주석 사이에서는 서로 남북통일을 추구했었다는 견해도 있었지만, 인적 물적 손실이 상당했기 때문에 휴전 협상쪽으로 흘러갔다.

당시의 사진. 판문점에서 휴전 협정에 서명하는 양군 대표의 모습이다.

(출처:위키피디아)
- 서명자 목록
미국 육군 중장: 윌리엄 해리슨 Jr
조선 인민군 대장: 남일
유엔군 총사령관: 마크 웨인 클라크
중국인민지원군사령원: 펑더화이
조선 인민군 최고 사령관: 김일성

판문점 -1951년 10월 25일 (목) 탄생-

판문점은 조선 분단을 상징하는 중요한 장소이다. 개성시에서 동남쪽으로 8㎞ / 서울까지의 거리는 70㎞이다. 원래는 개성과 서울간 도로가에 있는 한 마을이었는데, 한국전쟁휴전 담판이 진행된 이후로 유명해졌다. 1953년 이후 남북 군사 분계선 상에 중립국 감독위원회와 군사 정전위원회 등의 시설이 설치되었다. 북측은 조선군, 남쪽은 한국군이 경비를 맡고 있다. 북측은 '판문각' '통일각', 한국측은 '자유의 집' '평화의 집'등 회의가 가능한 시설이 있다.

38선 -1945년 8월 15일 (수)-

38선은 제2차 세계대전 말기에 서방국가(미국 • 영국)과 동쪽(소련)이 한반도를 분할 점령했을 때 그은 한반도를 가로지르는 북위 38도 라인을 가리킨다. 따라서 남쪽(한국)은 서방국가의 정책으로 자본주의가 되고, 북측(조선)은 소련주도 하에 사회주의가 되었다.

판문점 다음에는 고려성균관으로 이동.

고려성균관 (세계문화유산)

992년: 최고의 교육기관인 '국자감'이 창립됨.
1308년: 대성전등이 증설됨. '성균관'으로 명칭이 변경됨.
1592년 ~ 1598년: 임진왜란.
※ 일본 침략자에 저항하여 벌어진 반침략전쟁.
1602년: 임진왜란때 소실된 것을 복원함.

성균관은 양반의 자제에게 봉건적인 유교 교리를 가르치고 관리를 양성하는 교육기관일 뿐만 아니라 유명한 유학자들을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장소이기도 했다. 20여 동의 건물로 이루어져 있지만 기본 건물은 남북 방향으로 배치되어 있다. 현재는 고려 박물관으로써 1천여 점의 역사 유물과 자료가 전시되어 있다. 앞마당에는 1000년 이상 연륜을 가진 은행나무와 느티나무가 있다.

선죽교(세계문화유산) -1216년에 지어진 작은 돌다리-

1392년(고려 말기): 이성계파 일부가 고려 왕조의 충신 정몽주를 살해한 장소이다. 처음에는 선지교(選地橋)라고 불리었지만, 정몽주가 흘린 핏자국에서 대나무가 자랐다고 전해지면서 선죽교(善竹橋)라고 불리게 되었다.
1780년: 정몽주 후손인 정호인이 고인을 추모하여 다리에 난간을 붙이고 옆에 돌다리를 하나 더 만들었다.

표충비 -1740년 (왼쪽) 1872년 (오른쪽)-

고려 왕조 충신이었던 정몽주처럼 조선 봉건 왕조를 섬기도록 촉구하는 의도로 세워진 비석이다.

우표 판매점 (고려 성균관 앞)

여기서 일본 자택으로 보낼 엽서를 구입했다. 우편물은 호텔 1F에 제출 하면 된다.

평양 서커스 극장 -2002년 개관-

만경대 구역 광복대로를 따라 위치한다. 수용 가능 인원 수는 3500명.
인생 최초의 서커스를 국외에서 구경했다. 감개무량. 현지 옵션 요금은 3000엔이다.

동영상

조선미인

스타일 별로 나누면 왼쪽부터 순서대로, 청순미인타입, 건강미인타입, 쇼와 아이돌타입, 여동생타입, 사차원 귀염이 타입이라고나 할까.

※ 현지 안내인과 점원들.

그런 사차원 귀염이님이 따라준 대동강 맥주가 바로 이것이다.
거품의 비율은 5:5. 맛을 느끼기 전 시간을 즐길 수 있었다.

조선요리

한반도 유래의 냉면, 삼계탕, 오리 불고기 등이 유명하다. 삼계탕은 닭고기와 인삼, 표고 버섯, 찹쌀 외에 영양가 높은 재료들을 함께 끓인 요리이다. 현지에서는 옵션 3000 엔으로 먹을 수 있다. 약선 요리, 보신요리(보양식)로 취급받는다.

나는 매번 남김없이 먹는데, 때로는 다 먹은 그릇을 보고 사람들이 "충분한 양을 준비하지 못해 죄송합니다"라고 말하는 경우도 있었다. 또한 조선 분은 남에 대한 평가를 할 때 '좋다' 또는 '싫다'둘 중 어떤 것이냐고 물어봐도 '따뜻하다' 또는 '차갑다' 등 품위있는 표현으로 대답한다. 다른 나라 사람에 대해서도 개인적인 판단으로 평가를 내리는 발언은 하지 않는다. 사람에 대한 믿음에 관련해서도, 기대는 하지만 어디까지나 결과가 중요하다는 현실적인 의견을 가지고 있었고, 그런 대화 하나하나가 흥미로웠다. 평양 마지막 만찬은 '오리 불고기'였다. 평소에 물가에서 서식하는 오리 고기는 씹는 맛이 좋고, 씹으면 씹을수록 달콤하고 즙이 풍부하다. 한마디로 오리고기에 반했다.

조선과자

이 사진은 평양슈퍼에서 구입한 과자이다. 안타깝게도 가게 안에서는 촬영이 제한되었지만, 1층에서는 식료품을, 위층에서는 의류나 가전제품도 팔았다. 왼쪽 제품은 맛으로 봤을 때 감자, 소금, 식물성기름, 쇠고기 맛 조미료 등이 섞인 싱거운 감자칩이라고나 할까.

3박 4일은 순식간에 지나갔다. 내가 놀란 것은 결코 '위협'이 아니라 현지 분들의 '예절'과 '의리, 인정'이었다.

이 날은 호텔로 돌아와 다음날 귀국을 위해 취침했다.

2017년 9월 15일 (금) 조선 06:02 | 일본 06:32

미사일발사 25분전 ---.

현지에서는 대부분 사람이 알지도 못한 사이에 사태가 급변하고 있었을 것이다.
아침 해와 동시에 눈이 떠져서, 공교롭게도 호텔에서 일출을 촬영하고 있던 그 때, 이미 미사일 발사 준비가 시작되고 있었던 것이다.

미사일발사 2분전 ---.

06:25 | 06:55 - 평양 조식 -
나는 이 시간에 미사일이 발사되었다는 정보를 귀국 중 북경공항에서 알았다.
사진 촬영 시간도 모두 고려하면, 정말 이 나라에서 쏘아 올린 것인지조차도 의심스러울 정도로, 현지 분들도 몰랐던 것이 아닐까?

06:27 | 06:57 - 미사일 발사 (장소는 평양 인근 순안 지역)
06:31 | 07:01 - J 경고 경보
06:34 | 07:04 - 홋카이도 상공 통과

06:39 | 07:09 - 호텔 출발 -

06:46|07:16
미사일은 에리모미사키의 동쪽으로 약 2200㎞인 태평양에 낙하했다.
최고 고도는 약 800㎞, 비행거리는 과거 최장거리인 3700㎞.
조선에서 괌까지의 거리는 약 3400k㎞.

07:00 | 07:30 (공항으로 향하는 차 안)
신세를 진 일본어 가이드 경력 10년 차인 여성 가이드 리씨에게는 자사 브랜드의 오리지날 T셔츠를 선물하고 손톱을 닦아주었다.

평양국제공항 도착 (순안국제공항) 07:10|07:40

일본어 가이드 경력 5년차인 남성 가이드 김씨에게도 마찬가지로 자사 브랜드의 T셔츠를 선물했다. 사실, 이 T셔츠 금액을 일본어 특유의 말장난으로 읽으면 특별한 의미가 나타난다. 상품 가격은 세금 별도 11351엔. 일본어로 "좋은 미래"라고 읽을 수 있다. 세금을 포함하면 12259엔. "자유롭게 입국"이라는 단어가 나타난다. 이 숫자가 의미하는 "좋은 미래"는 "자유롭게 입국"할 수 있고 벽이 필요없는 세계에 대해 호소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07:21|07:51 -공항안

신세진가이드두분

두 분은 일본의 세계유산에도 밝아, 가까운 미래에는 일본관광을 꿈꾸고 있었다. 두 분은 매우 친절하고 성실했다. 개인적인 이야기도 서슴없이 들려주는 만큼 서로의 신뢰를 쌓을 수 있었다. 무엇이 가장 내 마음을 움직였는가 하면, 이 글에는 나타나지 않았지만 드라이버 김씨에 대한 가이드 리씨의 배려와 관심이다. 드라이버 김씨는 식사시간은 매번 함께하지만 안타깝게도 술은 마시지 못하기 때문에 누구보다 빨리 먹고 차로 돌아가 나를 기다려야 했다. 리씨는 그것을 옆에서 보고 자신의 메인 요리를 테이크 아웃하여 용기에 담아, 아침 일찍부터 밤 늦게까지 운전하는 김씨를 위해 '술안주'를 만들고 있었던 것이다. 자신의 보상을 타인에게 양보할 수 있는 사람은 매우 드물다.

마지막으로, 내가 지금까지 도청당하고 있었는지를 묻자 "안 했다고 대답해도 못 믿겠지요"라고 미소를 보이며 대답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무례한 질문만하던 나지만, 싫은 기색 하나 보이지 않고 진지하게 대답을 계속 해준 가이드들에게는 감사하는 마음 밖에 없다.

북경공항 도착. 중국 10:00|일본11:00

5일만에 핸드폰이 연결돼 일본친구로부터 메시지를 받았다.
"오늘아침 조선에서 미사일이 발사된 것 같은데 무사히 귀국할 수 있어?" 라는 메시지였다. 바로 몇 시간전에 호텔이나 공항에서 보낸 시간을 여러 번 되돌아봐도 전혀 믿을 수 없는 정보였다. 그리고 무사히 귀국하여 그 날은 막을 내렸다.

엽서 한 통

귀국 후 2주일이지나, 평양에서 한 통의 엽서를 무사히 받을 수 있었다.

돌이켜보며.

현지에서 많은 분들과 만났는데 매우 친절하고 순수한 사람이 많았다. 눈은 입만큼이나 사실을 말해주니 틀림 없다. 조선 인구는 약 2500만명, 한국은 5000만명 정도이다. 평양을 벗어나면 산과 밭이 많은 것은 부정할 수 없지만, 관광지는 각지에 있다. 만약 남북 통일이 실현될 경우에는 새로운 관광지를 기대할 수 있는 것이다.

일본과 조선의 역사

이상이 조선의 '현재'에 대한 보고였는데, 과거의 조선과 일본의 역사에 대해 다시 한번 되돌아보도록 하겠다.

1910년 8월 29일 (월) ~ 1945년 9월 2일 (일)
당시 한반도는 일본의 식민지로, '한일합병'또는 '일제시대' 등으로도 불렀다.

1937년 7월 7일 (수)
루거우차오 사건과 함께 중일 전쟁이 시작된다.

1937년 12월 13일 (월)
난징사건일본군이 중화민국 수도 난징을 점령하고 두 달에 걸쳐 비전투원 살해 및 약탈행위를 했었던 사건. 그러나 중국 측은 "피해자 수는 인민의 감정에 비례한다"며 구체적인 숫자는 밝히지 않았다.

1939년 9월 1일 (금)
독일군이 폴란드를 침공한 것을 계기로 영국과 프랑스가 독일에 선전 포고하면서 제 2차 세계 대전 불씨가 되었다.

1941년 12월 8일 (월)
중일전쟁 중 일본, 독일, 이탈리아 삼국이 군사동맹을 맺었고 일본이 미국 해군이 체류하는 하와이 진주만을 공격하면서 "태평양전쟁"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의도치않게 총력전으로 나아가, 중일전쟁은 진흙탕 싸움이 되었다.

1945년 8월 6일 (월)
미군이 일본 히로시마에 원폭을 투하했다.

1945년 8월 9일 (목)
미군이 일본 나가사키에 원폭을 투하했다.

1945년 8월 14일 (화)
일본이 포츠담 선언을 수락.

1945년 9월 2일 (일)
전세계적 규모이었던 제2차 세계대전, 일본의 항복문서 서명으로 종결.
일본이 패전하여 한반도는 일본 식민지로부터 해방되었으나 이후 38선 이북은 소련군이 군정을 맡고, 남쪽은 연합군 군정 하에 들어갔다. 또한 일본이 전쟁중에 조선인들을 동원 및 징용한 것이'강제적'이었는지 '자발적'이었는지 여부에 대해서 후에 논쟁이 불거졌다.

1948년 8월 15일 (일)
한반도의 분단과 초대 최고 지도자의 취임.
남쪽은 이승만 대통령이 이끄는 대한민국이 성립되었다. 1948년 9월 9일 (목) 북한은 김일성 주석이 이끄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성립되었다.

1950년 6월 25일 (일) ~ 1953년 7월 27일 (월)
한국 전쟁의 발발 - 휴전 협정 체결.
김일성 주석이 이끄는 조선이 중국의 모택동 주석과 소련의 요셉 스탈린 대원사 동의와 지원을 받아, 국경선이었던 38선을 넘어 한국에 침략을 시도함으로써 발발하고, 한반도 전체를 전쟁터로 만든 대규모 국제 분쟁이다. 소련 유엔 대표 야콥 말리크가 라디오 방송을 통해 휴전을 제안하여, 결정타없이 휴전 협정이 체결된다. 휴전 협정에는 유엔군, 조선군, 중국군 3자가 서명했다.

1959년 12월 14일 (월) ~ 1984년 7월 25일 (수)
재일 조선인 귀환사업과 일본인 아내의 이주.
조선에서 가장 가까운 동해를 접한 니가타현 니가타항에서 출항했다. 93,340명이 북한으로 건너갔으며 그 중 6,839명은 일본인 아내와 아이 등 일본국적보유자였다.

1977년 ~ 1983년
조선인에 의한 일본인 납치 발생.
확인된 일본 실종자 수는 868명 안팎이다. 나중에 전 공작원과 탈북자들 증언을 비롯해 다양한 정보가 일치해서 24명 정도 납치 피해자를 확정했다. 당시 나이로 13세 ~ 52세 정도 분들이 납치되었다.

1987년 11월 29일 (일)
대한항공기 폭파 사건.
승객 115명이 사망. 실행범 김현희 전 공작원은 음독 자살을 기도하지만 응급 치료에 의해 목숨을 건졌다. 나중에 산 증인으로써 중요한 인물이 된다.

1991년 1월 30일 (수)
북일 정상 회담.
1991년 1월 30일 (수) 부터 '북일 수교 협상'이 시작됐지만 1992년 11월 5일 (목) 제 8차 협상 이후로 중단되어버렸다.

1995년 ~ 2000년
일본 정부가 조선에 대해서 쌀 지원.
1995년 ~ 2000년까지 일본 정부가 조선에 총 1700억엔 치 (118만톤) 쌀을 제공했다. 당시 자민당 노나카 츠토무간사장 대리와 무라야마 전 총리는 이렇게 코멘트를 남겼다. "내게 남은 쌀이 있고 이웃이 고통받고 있다면 돕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2002년 9월 17일 (토)
일본 총리 첫 방북 • 북일 정상 회담.
평양의 백화원 초대소에서 일본 고이즈미 준이치로 전 총리와 김정일 총서기 대담이 진행됐다. 납치 사실을 인정하고 사과를 한 조선은 일본인 납치 피해자 4명의 생존을 확인하고, 8명의 사망을 발표했다. 그 사망자 중 한명으로 당시 13세였던 요코다 메구미씨도 있었는데, 그 딸인 김은경씨 존재도 함께 밝혔다. 남편은 납북자 김영남씨였는데, 남편의 폭력 때문에 1992년 3월에 이혼한 것으로 알려졌다. 

2002년 10월 15일 (화)
5명의 납북자 귀환.
고이즈미 총리가 협상을 통해 5명의 납북자의 귀환을 실현했다.

2004년 5월 22일 (토)
제 2회 북일 정상 회담.
평양 대동강 영빈관에서 일본 고이즈미 준이치로 전 총리와 김정일 총서기 대담이 다시 진행됐다. 이후 식량과 의약품 등 총 약 70 ~ 80억 만엔 치를 제공했다.

2004년 11월 9일 (화) ~ 14일 (일)
제 3회 북일 실무자 협의.
요코타 메구미 씨 유골을 가져가 DNA 검사를 한 결과 다른 사람의 DNA가 채취되었다. 또한 사망했다고 발표된 날짜 이후에 요코타 메구미 씨 목격 정보가 몇 번 입수되었다.

2006년 5월 16일 (화)
요코타 메구미씨의 아버지와 그 전 남편 어머니의 첫 대면.
서울 송파구에 있는 회의실에서 요코타 메구미씨의 아버지인 시게루 씨(73세)와 동생 데쓰야 씨 (37세), 그리고 전 남편인 김영남 씨 어머니인 최계월 씨(82세)가 대면했다.

2006년 6월 28일 (수)
납북자 김영남 씨와 모자 상봉.
조선에 있는 금강산에서 28년 만에 김영남 씨와 그 김영남 씨의 어머니(최계월), 언니(김영자)가 재회했다. 김영남씨는 납치된 것이 아니라 표류되어 조난당했는데 조선측이 구조해준 것이라고 증언.

2006년 7월 5일 (수)
동해를 향해 '미사일 발사 실험'이 진행된다.
조선에서 동해를 향해 대포동, 탄도 미사일이 총 7발 발사되었다.

일본의 독자적인 제재의 시작.
동해를 접한 니가타현은 한반도에서 가장 가까워서, 재일 조선인의 귀환 사업을 계기로 1971년부터 2006년까지 만경봉호라는 부정기 화객선이 취항했었다. 그러나 2006년 7월 5일 (수)에 실시된 미사일 발사실험과 향후 핵실험에 대한 발표 때문에 입항금지조치를 실시했다. 해당조치를 시작으로, 입항금지조치 연장과 추가 제재가 계속되고 있다.

2014년 3월 10일 (월) ~ 14일 (금)
요코타 메구미 씨의 딸 김은경 씨와 첫 만남.
몽골 수도 울란바토르에서 요코타 메구미 씨 부모님(시게루 • 사키에)과 손자 김은경 씨가 면회하고 증손자와도 만났다.

일본은 2014년 이후 다시 외교 채널을 잃어버렸다.

니가타현시찰 2017년 9월 20일 (수) ~ 21일 (목)

"상대의 눈높이에 서지않으면, ○○ 태어나지 않는다"

1977년 11월 15일 (화), 어느 한 소녀가 홀연히 사라진 니가타현의 납치현장을 시찰했다.

지금부터 41년전 ---.

그녀의 이름은 요코타 메구미씨. 당시 해안 부근에 사는 13세의 그녀는 학교 하굣길에 사라졌다. 나중에 일부 조선공작원에게 납치된 것이 밝혀졌다.

니가타역 도착 2017년 9월 20일 (수) 21:05

요코타 메구미씨가 어떤 인물인지 알아야 지방풍습도 알 수 있다. 나는 여러 택시를 타며 많은 정보를 모았다. 한가지 알게된 것은 니가타 사람은 택시기사님을 비롯해 매우 친절하고 우호적인 분들이 많다는 것이다.

2017년 9월 21일 (목) 05:34
이 날 이른 아침에 본 구름은 마치 누군가가 '별'을 잡으러 가려고 하는 듯이 보였다.

당시 그녀가 조선에 가져간 기억과 추억은 무엇일까? 만약 그녀가 말로 직접 메시지를 전할 수 없다면, 어디에 어떻게 메시지를 남길 것인가.

만약 내가 그녀의 입장이라면, 사람•지명•상공에서 봤을 때 특정한 사람만이 알 수 있는 '암호'를 남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절대로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 아니고, 애절함을 담은 '마음'을 남길 것이다.

1970년대 / 납치현장 주변의 상공

현재의 조선과 니가타를 비교


평양의대동강 (옥류교 1960년) 니가타의 시나노가와 (만다이다리 1886년)

니가타에 세워진 간판

니가타현의 납치현장 부근에는 이런 간판이 서있다.
맨 왼쪽에 세워진 간판에는 '우리가 목표로 하는 니가타'라고 쓰여져 있으며, 마지막 문장에는 이렇게 적혀있다. "바다 건너에는 친구 나라. 우리는 세계평화가교가 될 것이다. 1990년 4월 1일 (월) 제정." 이 문장에 담긴 마음이 진심이라면 반드시 실현해야 한다. 중간 간판에는 납치에 관한 정보제공을 요청하는 간판. 맨 오른쪽 간판은 시계가 보급되지 않았던 100년 정도 전에는 여기서 대포로 공포탄을 쏴 정오를 알렸다고 기재되어 있었다.

마지막으로.

내가 이 기사를 다 쓸 때까지 정신을 차려 보니 7개월이 지나버렸습니다. 그것은 많은 감정이 복받쳐서 쓰고 다시 지우고를 반복했기 때문입니다. '전쟁'을 주제로 글을 쓰면서, 아무도 상처받지 않는 기사를 쓰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라고 실감했습니다.

일본과 조선 사이에 남아있는 이산 가족 문제와 미국이 일본에 투하한 원자 폭탄을 되돌아보면 분노와 슬픔을 느끼지만, 신기하게 미래도 느낍니다.

왜냐하면 일본과 미국은 이제 막 전쟁의 과거로부터 새로운 미래를 함께 쌓아 올리려 하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이것은 조선 통일뿐만 아니라 앞으로 전세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은 한번 잃은 믿음을 되찾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새로운 믿음을 쌓는 것은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매일 남일처럼 느끼는 '비현실적'인 사건도 언제 자신의 일이 될지 모릅니다. 그렇기에 일상을 늘 '감사'하게 되었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일본에서 40년 넘게 가족의 귀환을 기다리는 '이산가족상봉' 실현을 위해 스스로 현지 규칙에 따라 국민분과 관계를 구축해나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계가 조선에 대한 편견을 조금이라도 덜 수 있도록, 자신이 직접 느낀 점을 기사에 남기는 것입니다.

과거와 타인을 바꿀 수는 없지만 자신과 미래는 바꿀 수 있습니다.
그리고 타인에게 '계기'를 만들어 줄 수 있습니다.

또한 사람은 환경과 함께 진화하는 생물이며, 언어도 진화하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사람과의 '대화'를 결코 포기해서는 안됩니다. 왜냐하면 '언어의 힘'이야말로 사람의 마음을 가장 울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끝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2018년 2월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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