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과 조선의 역사
이상이 조선의 '현재'에 대한 보고였는데, 과거의 조선과 일본의 역사에 대해 다시 한번 되돌아보도록 하겠다.
1910년 8월 29일 (월) ~ 1945년 9월 2일 (일)
당시 한반도는 일본의 식민지로, '한일합병'또는 '일제시대' 등으로도 불렀다.
1937년 7월 7일 (수)
루거우차오 사건과 함께 중일 전쟁이 시작된다.
1937년 12월 13일 (월)
난징사건일본군이 중화민국 수도 난징을 점령하고 두 달에 걸쳐 비전투원 살해 및 약탈행위를 했었던 사건. 그러나 중국 측은 "피해자 수는 인민의 감정에 비례한다"며 구체적인 숫자는 밝히지 않았다.
1939년 9월 1일 (금)
독일군이 폴란드를 침공한 것을 계기로 영국과 프랑스가 독일에 선전 포고하면서 제 2차 세계 대전 불씨가 되었다.
1941년 12월 8일 (월)
중일전쟁 중 일본, 독일, 이탈리아 삼국이 군사동맹을 맺었고 일본이 미국 해군이 체류하는 하와이 진주만을 공격하면서 "태평양전쟁"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의도치않게 총력전으로 나아가, 중일전쟁은 진흙탕 싸움이 되었다.
1945년 8월 6일 (월)
미군이 일본 히로시마에 원폭을 투하했다.
1945년 8월 9일 (목)
미군이 일본 나가사키에 원폭을 투하했다.
1945년 8월 14일 (화)
일본이 포츠담 선언을 수락.
1945년 9월 2일 (일)
전세계적 규모이었던 제2차 세계대전, 일본의 항복문서 서명으로 종결.
일본이 패전하여 한반도는 일본 식민지로부터 해방되었으나 이후 38선 이북은 소련군이 군정을 맡고, 남쪽은 연합군 군정 하에 들어갔다. 또한 일본이 전쟁중에 조선인들을 동원 및 징용한 것이'강제적'이었는지 '자발적'이었는지 여부에 대해서 후에 논쟁이 불거졌다.
1948년 8월 15일 (일)
한반도의 분단과 초대 최고 지도자의 취임.
남쪽은 이승만 대통령이 이끄는 대한민국이 성립되었다. 1948년 9월 9일 (목) 북한은 김일성 주석이 이끄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성립되었다.
1950년 6월 25일 (일) ~ 1953년 7월 27일 (월)
한국 전쟁의 발발 - 휴전 협정 체결.
김일성 주석이 이끄는 조선이 중국의 모택동 주석과 소련의 요셉 스탈린 대원사 동의와 지원을 받아, 국경선이었던 38선을 넘어 한국에 침략을 시도함으로써 발발하고, 한반도 전체를 전쟁터로 만든 대규모 국제 분쟁이다. 소련 유엔 대표 야콥 말리크가 라디오 방송을 통해 휴전을 제안하여, 결정타없이 휴전 협정이 체결된다. 휴전 협정에는 유엔군, 조선군, 중국군 3자가 서명했다.
1959년 12월 14일 (월) ~ 1984년 7월 25일 (수)
재일 조선인 귀환사업과 일본인 아내의 이주.
조선에서 가장 가까운 동해를 접한 니가타현 니가타항에서 출항했다. 93,340명이 북한으로 건너갔으며 그 중 6,839명은 일본인 아내와 아이 등 일본국적보유자였다.
1977년 ~ 1983년
조선인에 의한 일본인 납치 발생.
확인된 일본 실종자 수는 868명 안팎이다. 나중에 전 공작원과 탈북자들 증언을 비롯해 다양한 정보가 일치해서 24명 정도 납치 피해자를 확정했다. 당시 나이로 13세 ~ 52세 정도 분들이 납치되었다.
1987년 11월 29일 (일)
대한항공기 폭파 사건.
승객 115명이 사망. 실행범 김현희 전 공작원은 음독 자살을 기도하지만 응급 치료에 의해 목숨을 건졌다. 나중에 산 증인으로써 중요한 인물이 된다.
1991년 1월 30일 (수)
북일 정상 회담.
1991년 1월 30일 (수) 부터 '북일 수교 협상'이 시작됐지만 1992년 11월 5일 (목) 제 8차 협상 이후로 중단되어버렸다.
1995년 ~ 2000년
일본 정부가 조선에 대해서 쌀 지원.
1995년 ~ 2000년까지 일본 정부가 조선에 총 1700억엔 치 (118만톤) 쌀을 제공했다. 당시 자민당 노나카 츠토무간사장 대리와 무라야마 전 총리는 이렇게 코멘트를 남겼다. "내게 남은 쌀이 있고 이웃이 고통받고 있다면 돕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2002년 9월 17일 (토)
일본 총리 첫 방북 • 북일 정상 회담.
평양의 백화원 초대소에서 일본 고이즈미 준이치로 전 총리와 김정일 총서기 대담이 진행됐다. 납치 사실을 인정하고 사과를 한 조선은 일본인 납치 피해자 4명의 생존을 확인하고, 8명의 사망을 발표했다. 그 사망자 중 한명으로 당시 13세였던 요코다 메구미씨도 있었는데, 그 딸인 김은경씨 존재도 함께 밝혔다. 남편은 납북자 김영남씨였는데, 남편의 폭력 때문에 1992년 3월에 이혼한 것으로 알려졌다.
2002년 10월 15일 (화)
5명의 납북자 귀환.
고이즈미 총리가 협상을 통해 5명의 납북자의 귀환을 실현했다.
2004년 5월 22일 (토)
제 2회 북일 정상 회담.
평양 대동강 영빈관에서 일본 고이즈미 준이치로 전 총리와 김정일 총서기 대담이 다시 진행됐다. 이후 식량과 의약품 등 총 약 70 ~ 80억 만엔 치를 제공했다.
2004년 11월 9일 (화) ~ 14일 (일)
제 3회 북일 실무자 협의.
요코타 메구미 씨 유골을 가져가 DNA 검사를 한 결과 다른 사람의 DNA가 채취되었다. 또한 사망했다고 발표된 날짜 이후에 요코타 메구미 씨 목격 정보가 몇 번 입수되었다.
2006년 5월 16일 (화)
요코타 메구미씨의 아버지와 그 전 남편 어머니의 첫 대면.
서울 송파구에 있는 회의실에서 요코타 메구미씨의 아버지인 시게루 씨(73세)와 동생 데쓰야 씨 (37세), 그리고 전 남편인 김영남 씨 어머니인 최계월 씨(82세)가 대면했다.
2006년 6월 28일 (수)
납북자 김영남 씨와 모자 상봉.
조선에 있는 금강산에서 28년 만에 김영남 씨와 그 김영남 씨의 어머니(최계월), 언니(김영자)가 재회했다. 김영남씨는 납치된 것이 아니라 표류되어 조난당했는데 조선측이 구조해준 것이라고 증언.
2006년 7월 5일 (수)
동해를 향해 '미사일 발사 실험'이 진행된다.
조선에서 동해를 향해 대포동, 탄도 미사일이 총 7발 발사되었다.
일본의 독자적인 제재의 시작.
동해를 접한 니가타현은 한반도에서 가장 가까워서, 재일 조선인의 귀환 사업을 계기로 1971년부터 2006년까지 만경봉호라는 부정기 화객선이 취항했었다. 그러나 2006년 7월 5일 (수)에 실시된 미사일 발사실험과 향후 핵실험에 대한 발표 때문에 입항금지조치를 실시했다. 해당조치를 시작으로, 입항금지조치 연장과 추가 제재가 계속되고 있다.
2014년 3월 10일 (월) ~ 14일 (금)
요코타 메구미 씨의 딸 김은경 씨와 첫 만남.
몽골 수도 울란바토르에서 요코타 메구미 씨 부모님(시게루 • 사키에)과 손자 김은경 씨가 면회하고 증손자와도 만났다.
일본은 2014년 이후 다시 외교 채널을 잃어버렸다.